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 (문단 편집) == 사건 이후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fIqGOtwF6wM)]}}}|| || [[대한뉴스]]의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사 서거> 보도 || 문세광은 즉시 체포되어 [[코렁탕|중앙정보부 조사실로 압송되었다.]] 당시 합동수사본부의 중간 브리핑에 따르면 문세광은 '''체포된 지 불과 5시간 만(=15일 저녁)에''' [[고문|수사관의 강한 압박]]에 굴복해 자신이 암살범이며 본명은 문세광이라고 자백한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담당 검사는 [[김영수(1942)|김영수]], [[정치근]] 검사로 나온다. 당시 [[김기춘]]이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의 법무비서관이자 검사로 있었는데 그는 자신이 문세광을 심문했다고 주장했다. 사건 이후에도 조총련의 김호룡을 통해서 공작금을 받고 북한과 연계되었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만 당시 [[일본 경찰]]의 조사에 의하면 김호룡이 줬다는 공작금은 문세광의 모친이 준 돈이었다고 한다. 2005년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한국 언론 최초로 김호룡과 인터뷰를 했는데 그는 자신이 암살을 교사했음을 부정했다. 또 당시 사건 조사를 맡았던 일본 경시청 경비국장 야마모토 시즈히코도 조총련과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이 연관이 있다는 증거가 없다고 밝혔다. 무엇보다도 '''김호룡은 이 사건으로 한국 수사당국을 통한 어떤 조사조차 받은 적이 없다.''' 김호룡 연루 의혹에도 불구하고 한국측에서 조총련 인사를 조사할 권한이 없었다는 것. 당시는 일본에서 재일교포의 숫자를 줄이기 위해 한국의 반대를 묵살하고 만경봉호를 통해 북한으로 [[재일교포 북송|재일교포들을 북송]]하던 시절이다. 이주하는 재일교포나 그들을 인질로 삼아 일본에 잔류한 그 가족의 재산을 노린 북한과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에 일본이 북한과 조총련을 자극하지 않았다. [[김일성]]은 북한이 저지른 여러 테러와 마찬가지로 늘 그렇듯이 이 사건과 자신과의 연계를 부정하였으며 한 술 더 떠 [[김대중]] 지지 세력이 배후인 것처럼 1974년 10월 25일 북한 주재 신임 소련대사 글레브 크리울린에게 말한 것으로 밝혀졌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11918761|#]] [youtube(04hjLXxXnrs)] 서울지법 문세광 1심 선고 공판(1974.10.19) 하여튼 그 결과 문세광에게는 내란목적 살인, [[국가보안법]] 위반, 반공법 위반, 출입국관리법 위반, 총포화약류 단속법 위반 등의 혐의가 적용되었고 사건 발생 4개월 뒤이자 [[대법원]] 확정판결 3일 만에 [[1974년]] [[12월 20일]] 오전 7시 30분 [[서울구치소]]의 [[사형]]집행장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사건의 여파로 경호책임자인 [[박종규]] 경호실장과 국립극장 행사 관리 책임자인 [[양택식]] [[서울특별시장]]이 경질되었다. 후임으로는 각각 '''[[차지철]]''', [[구자춘]]이 임명되었다. 양택식 시장은 [[서울 지하철 1호선]] 건설에 열성을 기울였지만 경질된 탓에 서울 지하철 1호선 개통식은 침울한 분위기에서 열렸으며 이로 인해 [[서울 지하철]]의 건설 계획 대부분이 뒤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원래 [[1기 지하철 계획|서울 지하철 건설 계획]]은 [[김현옥]] 시장 시절에 만들어져 [[양택식]] 시장 시절에 본격 추진될 예정이었으나 1호선만 이 계획대로 됐다. 이후 취임한 [[구자춘]] 시장이 지하철 건설 계획을 죄다 갈아엎고 새로 짰는데 가장 유명한 일화가 [[서울 지하철 2호선]] 노선 선정이다. [[포병]][[장교]] 출신이던 구 시장은 서울시 지도를 훑어보며 30분 만에 사인펜으로 줄을 슥슥 그었는데 그것이 오늘날의 노선이 됐다는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지만 경호 실패의 후임으로 경호실장이 된 차지철은 경호를 강화한다는 명분으로 군·경 예하에 [[대통령경호처/지원부대|대통령경호실 지원부대들]]을 창설하고[* [[대통령경호처/지원부대|이 부대들]]은 아직도 존재한다.] 중앙정보부, 대통령비서실을 비롯한 권력기관들에 '''[[월권]]을 행사해 [[어그로]]'''를 끌었다.[* [[10.26 사건]]의 배경에는 [[김재규]] 중정부장과 차지철 경호실장과의 갈등이 상당 부분 차지한다.] 정작 그러면서 [[10.26 사건|10월 26일 당일]]에는 '''권총도 휴대하지 않았으며[* 단, 박정희가 명령한 것이기는 하다.] 총 한 방을 맞고 [[빤스런|정작 대통령을 두고 자신은 화장실로 도망가는]]''' 도저히 경호원으로 볼 수 없는 추태를 벌였다. 그리고 그 해 9월 [[홍성철]] 내무부 장관, [[이봉성]] 법무부 장관 등의 각료들이 경질되었고 대신 [[김재규]] 건설부 장관 등이 새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치안국도 이 사건을 계기로 1974년 12월 24일 치안본부로 승격되었다.[* 치안본부는 1991년 대통령령에 의거하여 경찰법이 제정됨에 따라 [[대한민국 경찰청]]으로 변경되었다.] [youtube(/BAhlLcUert0)] 한편 문세광이 [[재일 한국-조선인|재일 한국인]] 출신 암살범이라는 것 때문에 당시 [[한일관계]]도 대단히 악화되었다. 사건 다음 날인 16일 [[노신영]] 당시 외무차관은 주한 일본 대사를 소환해 문세광에게 일본인 명의의 여권을 발급한 데 대한 공식 해명을 요구하는 동시에 김호룡 당시 조총련 오사카지부 정치부장 등 일본 내 공범에 대한 철저한 수사를 촉구했으나 일본의 수사가 정부가 기대한 것에 미치지 못하고 일본에서는 내정간섭을 받고 있다는 반한 여론이 고조되었고 당연히 대한민국에서 [[반일]] 여론이 거세어져 [[주한일본대사관]] 주변에서 매일같이 시위대의 항의집회가 벌어졌는데 자칫하면 흥분한 이들에게 점거당할 수 있었기 때문에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는 데모대의 대사관 접근 금지 조치를 내렸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4090600329201019&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4-09-06&officeId=00032&pageNo=1&printNo=8907&publishType=00020|기사]].] 당시 한국 정부는 [[을미사변]]을 파헤쳐 공론화할 것을 지시하며 일본과의 [[국교단절|단교]]까지 고려한 것으로 밝혀졌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2&aid=0000031574|'박 대통령 저격' 배후 수사 한·일 첨예 대립]] 이러한 사태는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가 [[1965년]] [[한일수교]] 당시 외무장관을 맡았던 [[시이나 에츠사부로]]를 특사로 파견해 일본의 책임 인정과 한국 수사기관과 협조한다는 내용의 친필을 전달해 일단락되었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409190032920100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4-09-19&officeId=00032&pageNo=1&printNo=8918&publishType=00020|기사]].] 시이나 부총재가 청와대를 방문해서 박정희와 대면했을 때 일본이 처음 보였던 무성의함에 노골적으로 불평하면서 질타했다. >금번의 일본 측 태도는 한국을 너무 무시한 것이다. 일본에서 출생하고 성장한 미국 청년이 미국 정부를 파괴하고 전복하려는 의도하에 일본 정부가 발행한 여권을 가지고 일본 관헌이 사용하던 무기로써 미국의 포드 대통령을 암살하려다가 요행히 대통령은 난을 면하고 포드 대통령 부인이 살해되었다고 한다면 일본 정부는 미국에 대해 법적, 도의적으로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는가? 일본에 있는 [[조선대학교(일본)|조선대학]]은 공산당 간부를 교육하고, 대한민국 정부를 파괴하고 전복하기 위한 간첩 양성소이다. 왜 조총련을 그렇게도 비호하고 두둔하는가? 사실 일본이 미지근한 태도를 보인 것은 불과 1년 전 [[김대중 납치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국에 망명 중이던 외국인 인사를 외국 정부 요원들이 멋대로 납치하면서 치안당국의 수사에는 전혀 협조하지 않은 것은 물론 자신들의 행위가 아니라고 발뺌한 사건이라 일본 입장에선 주권 침해라며 굉장히 불쾌하게 여겼던 사건이다. 그 때문인지 이 사건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발표에 대해 당시 많은 일본 언론들은 "[[아돌프 히틀러]]의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을 연상케 하는 자작극에 불과하다"는 논평을 했다.[* 참고로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은 [[나치 독일]]의 자작극이라는 주장이 많이 나왔지만 신빙성이 떨어지며 1933년 당시 재판에서도 나치당은 독일 공산당이 해당 방화사건을 주도했다는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였다. 물론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던 마리누스 판 데르 루베에게 바이마르 공화국 법원은 사형을 선고했지만 독일 연방법원에서 나치 시대의 공정하지 못했던 재판 과정과 정신질환자라는 점을 들어서 방화 여부에 대해 판단 없이 사면복권하였다. 현재 역사학계에서는 독일 공산당과 나치당의 충돌이 격했던 1933년에 정말로 우연한 타이밍에 터졌고 나치당은 이것을 이용한 것이라는 게 정설이다.] 박정희가 이 때 일본과의 단교도 생각하고 있었을 정도로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고[* 박정희가 [[도쿄 대공습|동경을]] [[커티스 르메이|폭격하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미국]]도 더 이상 사태가 악화되지 않게 두 나라 사이를 중재해야 했다. 미국은 [[대한민국 정부|한국 정부]]가 지나치게 강경하게 나온다고 보고 "더 이상 사태를 악화시키지 말라"는 입장을 [[한국 정부]]에 전달했다. 당시 [[조일환(1938)|조일환]] 같은 조폭들이 [[서울특별시]]로 상경하여 손가락을 끊는 단지 시위를 벌이며 "또 다시 [[을미사변|국모를 죽인]] 일본에게 원수를 갚자!"는 시위를 벌였다. <조폭으로 보는 대한민국 100년의 역사>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내용이다. 반면 박정희는 [[어부지리|단기적으로는 정치적 이득을 봤다.]] 당시까지 대외적으로 인권 문제, 특히 [[김대중 납치 사건]]으로 인해 일본에 숙이고 들어가야 했던 상황이었다. 김대중은 일본 정치인들의 초청을 받아 도쿄에 머물고 있었고 그걸 [[1973년]] [[8월 8일]] [[대한민국|한국]]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도쿄도|도쿄]] 그랜드 팰리스 호텔 객실 중 맨 위인 22층에서 무단으로 손님을 납치한 것이었기 때문에 일본의 반발은 엄청났다. 그런데 문세광이 [[일본]] [[여권]]으로 입국하였으며 암살에 사용된 총이 어쨌거나 [[일본 경찰]]이 도난당한 총이었기 때문에 일본이 책임을 피할 수 없었으므로 결국 기존의 불리하기만 했던 상황에서 비슷한 상황으로 바뀐 것이다. [[미국]] 역시 인권 문제 언급에 대한 수위를 낮추었으며 학생 운동까지 약화되었다. 이후 박정희는 이 사건 1주일 이후 [[긴급조치]] 1호와 4호를 해제하는 것으로 이런 상황을 안정화시켰지만 얼마 뒤 조총련계 재일교포 고향방문단 입국을 허락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대일관계도 관리에 들어갔다. 이런 점들이 자작설과 음모론이 탄생하였던 배경이다. 1974년 8월 20일 박정희 대통령은 정상 집무에 들어갔다. 이날 [[김종필]] [[국무총리]]는 오전, 오후 두 차례 대통령을 면담해 [[영부인]] 서거 후의 국정방향에 보고하고 자리에서 金총리는 후임 경호실장으로 당시 [[국세청장]]을 맡고 있던 [[오정근]]을 추천하였고 박 대통령도 긍정적이었다고 한다. 그는 5.16 당시 출동한 해병여단의 병력을 이끈 대대장을 맡았으며 가장 먼저 한강다리를 넘은 해병대 병력의 지휘관이었다. 이 날에 당시 [[사위]]이자 칠레대사를 맡던 [[한병기]]는 경호실장으로 당시 차지철 공화당 의원을 추천했다. 이날 오후 4시 33분부터 5시 20분 사이 차지철 의원을 부르고 이 자리에서 대통령은 경호실장으로 임명하겠다고 통보했다. 8월 21일 오후 2-3시 사이 박종규 실장이 대통령에게 사임인사를 하고 신임 차지철 실장이 취임인사를 드리는 것으로 임무교대가 되었다. [[전인권(저술가)|전인권]]의 <박정희 평전>에서는 당시나 지금이나 겉으로는 근엄하고 딱딱해 보이는 박정희는 내적으로는 아내에게 내심 굉장히 의지해서 자신을 죽이려던 문세광의 테러로 부인이 사망한 충격 탓에 마음이 극도로 약해져 이는 대통령 경호를 명분으로 자신의 권한을 넘어서는 월권을 행사하여 주변의 원성을 사던 차지철 경호실장 같은 사람에게 흔들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 가설은 유신 말기 박정희의 행보를 설명하려는 것이며 실제로 박정희에 관한 책들을 여러 권 내놓고 글을 쓴 [[조갑제]]는 2인자가 지나치게 부상하는 것을 방지하고 심복들 간에 상호견제를 하는 방법으로 정권을 지탱하던 박정희의 통치력이 약화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며 [[김일성]]이 간접적으로 살해하였다는 결론을 내려 이 주장에 동의했다. [[육영수]]가 사망한 후 모교인 [[배화여자중학교]]ㆍ[[배화여자고등학교]] 교정에는 육영수를 기리기 위한 '육영수 여사 기념관'이 세워졌다. 이를 계기로 배화여자실업전문학교가 설립되었고 이 학교는 2/3년제 대학인 [[배화여자대학교]]로 개편되었다. 이후 기념관은 배화여대의 대학본부로 쓰이고 있다. 한편 [[프랑스]]에서 [[유학]] 중이던 [[육영수]]의 장녀 [[박근혜]](당시 22살)가 귀국해서 10.26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 [[영부인]] 역할을 대신했다. 이때부터 박근혜는 어머니처럼 올림머리를 하고 다니기 시작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